■ 1597년(정유년1)
8월 18일. 맑았다.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 수사 배설(裵楔)이 배멀미를 핑계 대었기에 만나지 않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월 19일. 맑았다. 장수들이 교서(敎書)에 숙배를 했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업신여기고 오만한 태도를 말로 다할 수 없었기에 그의 영리(營吏)를 잡아다 장(杖)에 처했다.
8월 20일. 맑았다. 앞 포구가 아주 좁아 진을 이진(梨津)으로 진(陣)을 옮겼다.
8월 21일. 맑았다. 날이 새기 전에 토하고 설사를 하면서 심하게 아팠다.
몸이 차게 있었기 때문인가 싶어 소주(燒酒)를 마셨다.
얼마 후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밤새 앉아 있었다.
8월 22일. 맑았다. 토하고 설사하는 것이 더욱 심해 일어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8월 23일. 맑았다. 아픈 것이 너무 심해 배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해 배를 타는 것을 멈추고 바다에서 나와 육지에서 잤다.
8월 24일. 맑았다. 일찍 도괘(刀掛)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어란(於蘭) 앞바다에 도착했다. 가는 곳마다 텅 비어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8월 25일. 맑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당포(唐浦)의 포작(鮑作)이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냈다. 나
는 이미 그 말이 거짓인 줄 알고 있었기에 헛소문을 낸 2명을 붙잡아 곧바로 참(斬)해 효시(梟)하게 했더니 군중(軍中) 인심이 크게 진정되었다.
8월 26일. 맑았다. 그대로 어란(於蘭)에 머물렀다.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이 이진(梨津)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우수사(김억추)가 왔다.
8월 27일. 맑았다. 그대로 어란(於蘭) 바다 가운데 머물렀다.
8월 28일. 맑았다.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자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했다.
경상 수사(배설)도 피해 물러나려고 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적선이 가깝게 다가왔을 때 소라를 불고 깃발을 휘둘러 뒤쫓게 했더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葛頭)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8월 29일. 맑았다. 아침에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갔다.
8월 30일. 맑았다. 그대로 벽파진(碧波津)에서 머물렀다.
9월 1일. 맑았다. 그대로 벽파(碧波)에 머물렀다.
9월 2일. 맑았다. 정자(亭)에 앉아있는데 포작(鮑作) 점세가 제주에서 와서 인사했다.
이날 새벽에 배설(裵楔, 경상 수사)이 도망갔다.
9월 3일.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배의 뜸집 아래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9월 4일. 북풍이 크게 불었다. 배들을 간신히 보전했다. 하늘이 도왔다(天幸).
9월 5일. 북풍이 크게 불어 배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9월 6일. 바람은 멈춘 듯했지만, 파도는 가라앉지 않았다.
9월 7일.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 군관(探望軍官) 임중형(林仲亨)이 와서“적선(賊船) 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於蘭)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그 의도가 우리 수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에 엄하게 타일러서 경계하게 했다.
오후 4시에 적선 13척이 곧바로 진(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하며 나아가니, 적선들은 배를 돌려 달아났다.
먼 바다에까지 추격했지만, 바람과 물결이 모두 거꾸로 였기에 배를 몰 수 없어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에 적의 기습이 있을 듯했다. 밤 10시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을 해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어서 다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적선에 다가가 포를 연달아 쏘았더니 적의 무리는 당하지 못하고 밤 12시에 물러갔다.
이들은 한산도(閑山)에서 이미 승리했던 자들이었다.
9월 8일. 맑았다. 적선은 오지 않았다.
9월 9일. 맑았다. 이날은 곧 9일(중양절)이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려는데 마침 부체찰사(副察使) 소관 군량 중에서 지원받은 제주의 소 5마리가 와 있었다.
녹도 만호(송여종)과 안골포 만호(우수)를 시켜 소를 잡아 장졸들에게 먹이고 있을 때, 적선 2척이 감보도(甘甫島)로 곧바로 들어와 우리 배가 많은지 적은지 정탐했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趙繼宗)이 끝까지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9월 10일. 맑았다. 적의 무리가 멀리 달아났다.
9월 11일. 맑았다.
9월 12일. 비가 계속 내렸다.
9월 13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9월 14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육로를 통해 육지에서 정탐하던 임준영(任俊英)이 달려와서,“적선 55척이 이미 어란(於蘭)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했다.
또한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중걸(仲乞)의 말을 전했다.
“이번 달 6일에 달마산(達磨山)으로 피난갔다가 왜인에게 붙잡혀 묶여서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 출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왜장에게 부탁해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귀에다 속삭이며 말하기를 '왜놈들이 말하기를,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 쏘아 죽이기도 하고 불태우기도 했으니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모두 죽인 뒤 곧바로 경강(京江)으로 올라가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비록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럴 까닭도 없지 않아 전령선(傳令船)을 우수영(右水營)에 보내 피난민들이 즉시 육지로 올라가도록 이르게 했다.
9월 15일. 맑았다. 밀물 때에 맞춰 여러 배들을 이끌고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들어가 머물러 잤다.
밤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9월 16일. 맑았다. 이른 아침에 정찰군사(望軍)가 들어와, “무려 200여 척의 적선이 명량(鳴梁)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을 하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둘러싸는 중에 상선(上船, 지휘선)이 홀로 적선들 속으로 들어갔다.
포탄과 화살이 비바람처럼 일었지만, 여러 배들은 구경만하고 나오지 않아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배 위의 사람들도 서로 바라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논하며 설명하기를, “적선이 비록 1,000척일지라도 감히 우리 배로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賊雖千隻 莫敢直搏我船 切勿動心 盡力射賊) ”라고 했다.
여러 배들을 돌아다보니, 이미 한 마장(馬場)쯤 뒤로 물러나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멀리 가서 아득히 멀리 있었다.
곧바로 배의 방향을 돌려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의 배로 가서 먼저 참(斬)하고 효시(梟示)하고 싶었지만,
내가 탄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다른 여러 배들은 즉시 더욱더 멀리 물러날 것이고, 적선은 점점 더 다가와 계획하고 기대한 일의 형세가 실패할 수 있었다.
중군장(中軍將)에게 명령을 내리는 깃발(中軍令下麾)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우게 했더니 김응함(金應諴)의 배가 점차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도 왔다.
나는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했다.
“네가 명령을 거스르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다시 불러 “안위야!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친다고 살 수 있느냐!”하고 말했다.
안위가 몹시 당황해 곧바로 뚫고 들어가 교전할 때, 적장(賊將)의 배와 다른 2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떨어져 헤엄치고 있었으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의 방향을 돌려 곧바로 안위(安衛)의 배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뚫고 들어갔다.
안위의 배에 있는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어지럽게 싸웠다.
내가 탄 배의 군관(軍官)들도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았다. 적선 2척을 남김없이 완전히 섬멸했다.
아주 천행한 일이었다(天幸天幸).
우리를 둘러싸고 포위했던 적선 30척도 쳐서 깨뜨렸다(撞破).
나머지 적들은 당해 낼 수 없어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이 빠져 배를 정박시키기 적합하지 않았다.
맞은 편 포(浦)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唐笥島)로 옮겨가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 1597년(정유년2)
8월 17일. 맑았다.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 백사정(白沙汀)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군영(軍營, 강진) 구미(仇未)에 도착했더니 온 지역에 이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水使) 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長興) 사람들이 많은 군량을 마음대로 훔쳐 가져갔기에 잡아다 장(杖)을 쳤다.
이미 해가 저물었기에 그대로 머물러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아주 한탄스러웠다.
8월 18일. 맑았다. 아침 늦게 곧바로 회령포(會寧浦)로 갔다.
경상 수사 배설은 배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을 만났다.
8월 19일. 맑았다. 장수들에게 교서(敎書)와 유서(諭書)에 숙배를 하게 했는데, 경상 수사 배설은 순순히 받들지 않았다.
그 마음이 매우 경악할 일이었기에 그의 이방(吏房)과 영리(營吏)를 장(杖)에 처했다.
회령포 만호 민정붕(閔廷鵬)은 위덕의(魏德毅) 등에게 술과 음식을 얻어먹고 전선(戰船)을 내주었기에 장(杖) 2에 처했다.
8월 20일. 맑았다. 포구가 좁아 진(陣)을 이진(梨津) 아래 창사(倉舍)로 옮겼다.
몸이 아주 불편해 음식을 먹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8월 21일. 맑았다. 밤 2시에 토하고 설사를 했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燒酒)를 마셔 치료하려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10여 번이나 토했다. 밤새 고통스러웠다.
8월 22일. 맑았다. 토하고 설사하다 인사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볼 수 없었다.
8월 23일. 맑았다. 병이 아주 심해 배에서 머무르기가 불편했다.
실제 전쟁터도 아니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8월 24일. 맑았다. 아침에 괘도포(掛刀浦)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낮에 어란(於蘭)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지나는 곳마다 이미 비어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8월 25일. 맑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당포(唐浦)의 어부가 피난민의 소 2마리를 훔쳐 끌고 가 잡아먹으려고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놀라게 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게 하고 즉시 잡아오게 했다.
결과는 예상과 같았다. 군사들의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배설은 벌써 도망쳐 나갔다.
헛소문을 낸 두 명을 참(斬)하고 효시해 돌려 보게 했다.
8월 26일. 맑았다. 그대로 어란(於蘭) 바다에 머물렀다.
늦게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급히 와서, "적선이 이미 이진(梨津)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전라 우수사(김억추)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가 갖춰지지 않았다. 그 꼴이 경악할 노릇이었다.
8월 27일. 맑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많았다.
나는 슬쩍 "수사(水使)는 어디로 피해 옮겨갔던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8월 28일. 맑았다. 아침 6시에 적선 8척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여러 배들은 겁을 먹고 후퇴할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소라를 불고 깃발을 휘둘러 추격하게 했다.
이에 여러 배들은 회피할 수 없어 한꺼번에 적선을 갈두(葛頭)까지 추격했다.
적선이 멀리 도망쳤기에 궁지로 몰 데까지 추격하지는 않았다 뒤따르는 왜선이 50여 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장도(獐島)에 진(陣)을 쳤다. 갈두(葛頭)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8월 29일. 맑았다. 아침에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8월 30일. 맑았다. 벽파진(碧波津)에서 머물면서 정탐꾼을 나눠 보냈다.
늦게 배설이 적이 많이 몰려올 것을 걱정해 도망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의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
나는 그의 속마음(情)을 알고 있지만 이때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고, 먼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기에 그런 생각을 숨기고 있을 때,
배설이 그의 노비를 시켜 소지(所志)를 올렸다. "병이 아주 심해 몸조리를 하고 싶다"는 것 등이었다.
육지로 올라가 몸조리하도록 제송공문을 써 보냈더니 설(楔, 배설)은 우수영(右水營)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9월 1일. 맑았다. 나는 배에서 내려가 벽파정(碧波亭)에 앉았다. 점세(占世)가 탐라(耽羅)에서 왔다.
소 5마리를 싣고 와 바쳤다.
9월 2일. 맑았다.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9월 3일. 아침부터 맑았는데 저녁에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밤에는 북풍이 불었다.
9월 4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배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배들을 간신히 보전했다.
9월 5일. 맑았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9월 6일. 맑았다. 바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추위가 엄습해 격군과 군사들이 아주 걱정되었다.
9월 7일. 맑았다. 탐망군관(探望軍官) 임중형(林仲亨)이 와서,
"적선 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於蘭)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의도가 반드시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장수들에게 전령(傳令)해 거듭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게 했다. 오후 4시에 과연 적선 13척이 쳐들어왔다.
우리 배들이 닻(碇)을 올려 바다로 나가 추격하자 적선은 배를 돌려 달아났다.
먼 바다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거꾸로 흘렀고, 적의 복병선(伏船)을 염려해 끝까지 궁지에 몰아넣을 만큼 추격하지는 않았다.
벽파정(碧波亭)으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약속하며,"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기습이 있을 것이니, 장수들은 예측한 것에 따라 대비하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軍法)에 따를 것"이라고 거듭 약속을 밝히고 자리를 파했다.
밤 10시에 과연 적선이 탄환을 쏘며 기습해왔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서서 지자포(地字砲)를 쏘니 바다와 산이 진동했다.
적의 무리들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4번이나 몰려왔다 물러나갔다 하면서 포만 쏘아댔다.
밤 1시에 완전히 후퇴해 도망쳤다.
9월 8일. 맑았다.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萬戶) 정도 수준이라 수사(水師)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
그런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함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 어디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만 한탄할 뿐이다.
9월 9일. 맑았다. 오늘은 곧 9일(중양절)이다. 년 중의 명절이기에 나는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몸이지만,장수와 군사들은 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온 소 5마리를 녹도 만호와 안골포 만호에게 주어 장병들이 나눠 먹을 수 있게 하도록 일렀다.
늦게 적선 2척이 어란(於蘭)에서 곧바로 감보도(甘甫島)로 와서 우리 수군이 많은지 적은지 정탐했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趙繼宗)이 끝까지 추격했더니, 적들이 놀라 당황해 배에 실었던 잡다한 물건들을 바다 속에 던지고 달아났다.
9월 10일. 맑았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났다.
9월 11일. 흐리고 비가 내릴 징후가 있었다. 배 위에 홀로 앉았더니 그리운 마음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아들 회(豚薈)는 내 마음을 알고 아주 불편해 했다.
9월 12일. 비가 내내 보슬보슬 내렸다. 배의 뜸집(篷) 아래에 있었는데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9월 13일. 맑았지만, 북풍이 크게 불었다. 배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꿈이 특별해 임진년(1592년) 대첩(大捷) 때와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9월 14일. 맑았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碧波) 건너편에서 연기가 올랐기에 배를 보내어 실어오게 했더니, 곧 임준영(任俊英)이었다.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 척 중에서 55척이 이미 어란(於蘭)에 들어왔다"고 했다.
또한 적에게 사로잡혔다 도망해 온 김중걸(金仲傑)의 말을 전해 주었다.
중걸(仲傑)은 이달 6일, 달마의산(達夜依山)에서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도 임진년(1592년)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을 만나, 그가 왜장에게 빌어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왜놈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김해 사람이 귀에 대고 왜놈들이 모여 의논한 것을 소곤소곤 말했는데,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아주 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 후 곧바로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나 그럴 까닭도 없지 않아 곧바로 전령선(傳令船)을 보내 피난민들에게 알아듣게 타일러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게 했다.
9월 15일. 맑았다. 밀물 때에 맞춰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진(陣)을 옮겼다.
벽파정(碧波亭)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鳴梁)을 등지고 진(陣)을 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병법에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고, 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軍律)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거듭 엄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지시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패할 것"이라고 했다.
9월 16일. 맑았다.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군(別望)이 들어와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鳴梁)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친 곳으로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즉시 여러 배에 명령을 내리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 여척이 우리의 배들을 둘러쌌다.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수로 많은 적과 싸우는 상황이라고 계산하고, 편안히 살기 위해 회피할 계획을 꾸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馬場)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 앞으로 돌진하면서 어지럽게 쏘아댔다.
지자(地字)․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 등을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듯 쏘았다.
군관(軍官) 등은 배 위에서 빽빽이 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았다.
적의 무리들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다가왔다가 물러갔다가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논하며 설명하면서, "적선이 비록 많지만 곧바로 덤벼들지 어렵다.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더욱 더 마음과 힘을 다해 적을 쏘고 또 쏘아라(賊船雖多, 難可直犯. 少不動心 更盡心力射賊射賊)."
여러 배들을 돌아다보니, 먼 바다로 물러나 있었다. 배를 돌려 군령(軍令)을 내리고 싶었지만 여러 적선들이 그 틈을 노려 더 덤벼들 수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라를 불게하고, 중군(中軍) 영하기(令下旗)를 세우게 했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게 했다.
곧바로 중군장(中軍將) 미조항 첨사 김응함(金應諴)의 배가 내 배에 가까이 점차 다가왔을 때,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했다.
"안위야,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안위야,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서 산다면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안위는 몹시 당황해 적선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또한 김응함(金應諴)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中軍)인데도 멀리 피해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상황이 또한 급하니 일단 공(功)을 세우게 해주마!"
그래서 두 배가 먼저 적진으로 쳐들어갔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을 시켜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기어가며 앞다투어 올라갔다.
안위와 그 배위의 사람들이 각자 죽을 힘을 다해(各盡死力) 혹은 몽둥이를 들거나, 혹은 긴 창을 잡거나, 혹은 수마석(水磨石)으로 무수히 어지럽게 쳐댔다.
배 위의 사람들이 그 힘이 다했을 때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았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어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평산포 대장(代將)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뒤쫓아와 힘을 합쳐 쏘아 죽이니 살아 움직이는 적(賊)이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安骨) 적진(賊陣)에서 항복해 온 자이다.
내 배 위에 있었는데, 바다를 굽어보다가, "그림이 그려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안골(安骨) 적진의 적장(賊將)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상(無上, 사공의 일종)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려놓게 했다.
준사가 바로 펄쩍 뛰면서,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곧바로 토막토막 잘라 죽이라고 명령을 했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꺼번에 북(鼔)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전진하며 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고, 화살도 빗발치듯 쏘았다.
적선 31척을 쳐서 깨뜨리자(撞破) 적선들은 피해서 물러갔고, 다시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우리 수군은 전투를 했던 바다에서 정박하려고 했는데, 물살이 아주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었고, 수군의 세력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唐笥島)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此實天幸)
1. 영화 속의 인물, 임준영은 일기에서는 임준형으로도 나옵니다.
2. 적장 마다시가 바로 영화속의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용)입니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통설이지만,
일본쪽 사료를 보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3. 백병전은 안위의 전선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영화처럼 배위에까지 일본군이 올라와 싸운 것은 아닙니다.
4. 이순신의 전투는 일기에서 보이듯 대부분 포를 활용한 전투입니다. 장군이 직접 칼을 휘두른 것은 아닙니다.
5. 이순신이 탈영병을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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