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은 일은 책임을 다해 철저히 하라>
2000년, 우리나라의 주요 리더들을 검증하기 위한 인사청문회법이 제정되었다.
국회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인사권 남발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인사청문회가 실시된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낙마했다. 낙마 이유도 다양했다.
위장 전입, 병역 비리, 부동산 투기, 이중 국적 등의 서민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행적 부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장관ㆍ차관이 되기 위해 줄을 서고, 눈 도장을 찍기 바빴던 인재들이 망신을 두려워 해 공직을 회피하는 일도 빈번해졌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니 면역력이 생겨 웬만한 일은 눈감아 주기도 했고, 인재 고갈을 우려해 도덕성 기준 대신 능력을 우선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어쨌든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비리와 거짓말들은 서민의 눈에는 여전히 불편한 모습이다.
그런 불의와 부정에 둔감한 그들을 지켜보면서 공직자의 자세와 책임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곳ㆍ어느 영역에서 일하든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조직이 정한 규칙, 사회가 정한 법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격이 아닐까.
또 리더라면 더더욱 앞장서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정의한 리더가 낙마하는 것, 그 자체가 정의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법과 원칙을 따르는 최고 책임자
이순신도 나랏일을 하는 사람, 공직자였다.
또 삼도(三道)의 수군을 이끄는 최고 수장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고위층과 같이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리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인사청문회를 그에게 적용한다면, 그야말로 무결점의 인재였다.
인사청문회를 고민하는 사람이나 인사청문회에서 쩔쩔매는 사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일삼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음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이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원하는 편지의 한 부분이다.
순신(舜臣)에게는 올해 여든 하나이신 늙으신 어머님이 계십니다.
임진년(1592년) 첫 무렵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함께 없어질 것을 두려워해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보전해 볼까 하여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와 순천 땅에 피난을 했습니다.
그때는 어미와 아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을 뿐 다른 것은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에는 적들이 명나라 군사에게 휩쓸려 숨고 도망갔기에 떠돌던 백성들이 모두 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음흉한 적들이기에 속임수가 많고 온갖 꾀를 다 부렸기에 저들이 비록 한 귀퉁이에서 진을 치고 있을지라도 어찌 그것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다시 쳐들어오면 그대로 어버이를 주린 표범의 입속에 넣어주는 꼴이 되기에 급히 돌아가지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순신은 원래 보잘 것 없는 재목으로 무거운 소임을 욕되게 맡았습니다.
그러나 나라 일 만큼은 허술하게 해서는 안될 책임이 있고(事有靡盬之責, 사유미고지책),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질없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정(情)은 더 심해졌고, 또 자식 걱정하시는 그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아침에 나가 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버이는 문밖에 기대어 서서 자식이 오는지 바라본다”고 했는데, 하물며 저는 어버이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벌써 3년이나 되는데 어버이의 그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수군 대장 이순신이 상관인 이원익에게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며칠 만이라도 휴가를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편지이다.
응석받이도 아닌 수군 대장이, 최고의 승부사가 어머니가 그립다며 찾아뵙게 휴가를 달라고 했다.
그것도 자신이 주둔하고 있던 한산도에서 먼 고향 아산에 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피난해 있던 순천이었다.
한산도에서 뱃길로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순천은 자신의 관할지였고,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와는 지척이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 기간 중에 3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본영이 있는 곳이기에 그냥 다녀와도 되고, 시찰을 명목으로 들렸다 와도 되고, 정히 눈치가 보였다면 몰래 잠시 다녀가도 아무도 모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도 3년 동안 찾아뵙지 못했다고 한다.
법도 법이지만 참 독한 사람이다.
1593년 초부터 강화 문제로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가, 그나마 어느 정도 전황이 안정되자 그제야 휴가를 청원한 것이다.
대장이었기에 진영을 쉽게 떠날 수도 없었고, 게다가 법에 정한 휴가 원칙을 지켜 상관의 허락을 받아 휴가를 가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이순신 자신의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적의 칼날,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는 현실, 또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전쟁이 무서워 탈영자가 속출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까지 법과 원칙을 위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법을 어기면서 백성과 부하들에게는 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철저한 책임감 때문이다.
백성과 부하들의 생사(生死), 나라의 존망(存亡)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나라 일은 허술히 할 수 없다
이순신이 편지에 언급한 “일에는 허술히 해서 안 될 책임이 있고(事有靡盬之責,사유미고지책)”의 ‘미고(靡盬)’는‘나랏일을 허술히 할 수 없다’는 본래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너새 날개(駂羽)>, <팥배나무(杕杜)>, <네 마리 말(四牡)>라는 시들에 나온다.
<너새 날개(駂羽)>에서는 “푸드득 날아 오른 너새 상수리나무에 모여드네(肅肅鴇羽, 集于苞栩). 나랏일 끝이 없어 기장도 심지 못해(王事靡盬, 不能蓺稷黍), 부모님은 누굴 믿고 살아가실까(父母何怙).
아득하고 아득한 하늘이여(悠悠蒼天), 언제나 돌아갈 수 있나요(曷其有所)”라는 구절에서.
<팥배나무(杕杜)>에서는 “팥배나무 열매 주렁주렁 열렸는데도(有杕之杜, 有晥其實), 나랏일 끝이 없어 세월만 흘러가네(王事靡盬, 繼嗣我日).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니 여자 마음 쓸쓸해져도(日月陽止, 女心傷止), 전쟁터에 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네요(征夫遑止)”라는 구절에서.
<네 마리 말(四牡)>에서는 “수말 네 필이 쉬지 않고 달리네(四牡騑騑). 주나라 가는 길 구불 구불하구나(周道委遲). 돌아가고픈 마음 어찌 없으랴만(豈不懷歸), 나랏일 끝이 없어(王事靡盬),
내 마음만 쓰라리고 속상하네(我心傷悲)”라는 구절에서.
《시경》의 이 시들은 모두 나라 일로 군대 간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아내가 군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 나랏일에 힘겨운 관리의 마음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순신은 《시경》의 노랫가락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 이원익에게 휴가를 간절히 요청했다.
그 옛날에도 나랏일은 힘들고 또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힘들었나 보다.
요즘의 고관대작을 꿈꾸는 사람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 아니 요즘의 비리 공직자 같았으면 그 와중에 축재(蓄財)까지도 했을 상황에서 이순신은 늙으신 어머니조차 찾아뵙지 못했다.
스스로 법과 원칙을 지키고 책임을 다했다.
그런 공직자가 많은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다.
열심히 일하는 공직자에게 격려를 보내고 탐욕스러운 공직자에게
매서운 질책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다.
국민이 무지하면 아까운 사람들만 희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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